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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로마의 연극
    문화예술 2023. 11. 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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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간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고대 로마의 연극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플라우투스 같은 사람들이 로마 국문학을 독자적인 눈높이로 승화시키기 수백 년 전부터 이탈리아지역의 남북에서는 다양한 소박한 초기 연극적인 면모가 흐르고 있었다.

    아테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시칠리아의 각 도시에서 비극을 상연하고 자기 자신도 시칠리아의 겔라에서 사망했다. 그 후 다시 에우리피데스의 각 작품은 특히 환영받아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비극의 창작에 몰두했다고 하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 비극의 눈에 띄는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탈리아 각지에서의 독자적인 연극 활동은 주로 희극 창작과 상연에로 몰려있었다. '즐거운 비극'이라 불렸던 이 희극은 그 전부터 남이탈리아에 식민 한 펠로폰네소스의 주민들이 이 땅에 가져왔던 모습으로, 주로 서사시나 전설의 영웅·미녀를 황당무계한 상황에 두고, 여러모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연기를 하게 한다는 취향의 것이다.

    기원전 300년경 시라쿠사의 시인 린턴이 이를 문학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하지만 작품은 완전히 없어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칠리아나 남이탈리아의 각지에서 사 온 항아리 등에는 장식으로서 이런 종류의 연극에 나오는 각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래서 그 당시의 활발한 유행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대식한 헤라클레스, 간계의 오디세우스, 인간 이하로 그 품성이 저열한 제신들의 각 테마와 어느 극에서나 등장하는 기본적인 3~4개의 타입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아테라나 극'의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지는 연극의 표본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또 플라우투스가 에서 사용했던 정경 설정 등도 예로부터 이 '즐거운 비극'의 테마로서 즐겨 사용되어 왔다. 한편 시정의 갈등을 다룬 극도 있고,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간의 싸움이나, 의 도둑 소동 등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정경도 묘사되고 있다.

    이 논란이었던 연극은 이후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캄파니아 지방의 오스카인 사이에 번지며 변형된다. 브코, 막스, 도세누스, 팝스의 네 가지 기본적 희극인물의 타입으로 설정되고 '아테라나 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보급된다. 한두 개의 병화에 의하면, 이에 이르러 구희극과 다분히 공통되고 있던 노골적인 희극 의상은 개정되고 파로스는 없어졌으며, 노예 등 하층 인물의 의상도 그 당시보다 긴 것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순회 배우의 일단이 보급하는 종류의 연극으로 극장의 양식도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목조무대가 사용되고, 거리의 광장이나 혹은 기성 경기장의 오케스트라에 즉석 무대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화제 시기의 로마 연극은 1년 중 국가의 축제일에 안찰관의 감독하에 개최되었으나 차차 그 빈도가 늘어 갔다. 가장 오래되고 성대한 '로마인의 축제', 기원전 220년부터의 '민중의 축제', 기원전 212년부터의 '아폴로 축제', 기원전 194년의 '큐 베레 축제' 등 해를 거듭하면서 연극제의 수는 늘어가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1년에 10여 일밖에 연극이 상연되지 않았지만 치세하에선 국가가 지정한 상연 일이 40여 일이나 되어 있었다.
    신 희극이 착실하게 로마의 관객을 매혹하고 있는 시절 아테네의 3대 비극작가의 여러 작품도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아키우스 등에 의해 라틴어로 개편되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의 문화는 초기 로마인의 종교를 비롯하여 정신생활의 각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처음으로 에트루리아의 예능인들이 로마를 찾은 것은 기원전 364년이었다. 라틴어의 히스트리오는 에트루리아어의 히스테르에서, 그리고 페르소나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의 댄서 페르스에서 유래된다. 이러한 음악·춤·노래는 로마 공화국 초기의 농민들 사이에서 많이 불렸던 이른바 파스켄니시 등과 혼합되어 사투라(혼합시)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전후하여 남이탈리아에서 희극이 오스크인을 통해 로마에 보급되고, 로마인의 취향을 자극해 로마 연극이 발생하는 직접·간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극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사라져 겨우 작품의 이름과 인용에 의한 단편만 전해질 뿐이며, 에우리피데스의 여러 작품을 따라 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원작과 비교하면 약간의 단편에서이긴 하나 과장되고 수사적인 대사가 두드러지고 그들이 즐겨 사용한 주제는 걸핏하면 피비린내 나는 자극적인 제재가 많았다. 뒤에 호라티우스는 비극작가 지망자들을 지적하면서 그리스의 대시인들이 말하고자 한 바를 잘 배우고 절도와 균형이 잡힌 작품을 쓰도록 알려준 바 있으나 그 충고도 헛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번역 된 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그로테스크한 과장은 당시의 조각이나 벽화에 그려진 비극 가면이나 배우의 의상에서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이목구비, 높이 묶은 머리, 그것에 어울리게 큼직한 패드를 넣은 옷, 키를 돋보이게 한 굽이 높은 신발 등은 이 시대에 와서 최고도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의상을 걸친 배우가 그 수사적인 대사를 또렷하게 읊을 때 얼마나 진중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었는지 혹은 생기를 잃은 중압감으로 시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나, 로마의 관객은 이보다 오히려 가면이 없는 촌극이나 무용 내지는 곡예 등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극장 그 자체의 구조도 그리스의 고전기 또는 헬레니즘의 양식과는 현저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남이탈리아의 구 그리스 식민 도시에서는 옛 시대의 극장이 희극을 상연했으나 로마에는 아직도 상설 극장이 없었으며, 경기장이나 거리의 광장에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관객을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공화제 말기가 됨에 따라 그리스풍 극장의 바탕 위에 로마 고유의 조건에 적합한 것을 만들어 냈다.
    두세 개의 중요한 변경을 든다면 완전한 원이었던 오케스트라는 반원이 되고,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한 건조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후자의 무대는 그 면적이 넓어지는 한편 합창대가 차지했던 오케스트라는 근대의 오페라 극장과 마찬가지로 귀빈석으로 변해버렸다. 무대의 배경은 실내의 벽면처럼 반주나 그림·조각으로 장식되고, 호화로운 장식적 분위기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구릉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설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극장은 성역화되었으나 로마에서는 평지에 지은 콜로세움 상의 것이 많고, 그 외면은 주 열이나 조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내부의 좌석도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구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고도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던 극장은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관람장이며 문예 작품의 상연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고대 로마의 연극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유익한 포스팅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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